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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아카데미 수상작 #3. 사울의 아들 (외국어영화상)



원래 아카데미 수상작에서 외국어영화상은 다루지 않지만, 이 작품은 특별히 다룬다. 지금껏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들이 많이 있었지만 조금 특별한 점이 있어서다. 더불어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이 당시의 증언들을 기록한 책 <잿더미로부터의 음성>을 읽고서 영화화하기로 결심했기에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제 있었던 일을 다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스토리는 <인생은 아름다워>와 같은 울림이 있지는 않으며, 섀도우 촬영 기법과 음향 효과 덕분에 당시의 현장을 간접 체험하는 데에는 적합하나, 보는 데에 다소 불편할 수도 있어 적극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호불호는 분명 있을 수 있단 얘기.

* 코너 특성상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어보시길 권함.


리얼리즘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을 확인해봤다. 라즐로 네메스. 역사학, 국제 관계학, 각본을 공부한 헝가리 감독이다. 이런 배경을 본다면, <사울의 아들>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건 분명하다. 이런 비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다시는 역사에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 뭐 그런 얘기겠거니. 그런데 다른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스토리 그 자체보다는 스토리를 전개시켜나가는 데에 사용했던 촬영 기법과 음향 효과를 통해 당시의 현장을 관객이 간접 체험하게끔 만들어준다. 마치 <그래비티>가 무중력 공간인 우주를 간접 체험하는 듯 느껴졌듯이.

필자는 영화를 볼 때, 기법을 그리 중요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토리에 집중하는 편인데, <사울의 아들>은 스토리마저도 당시의 비극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사울의 아들>은 당시의 비극적인 공간을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결코 잔인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가스실에서 나온 수많은 시체들을 쌓아둔 모습이 있는데 이를 지나가듯 보여준다. 화면에는 주인공인 사울의 얼굴에만 초점을 맞춰, 뒷편에 쌓인 시체들은 아웃 포커싱되어(흐릿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화면을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음향 효과를 통해 관객이 마치 현장에 있는 듯 느껴지도록 만드는 데에 집중했다. 이런 걸 전혀 모르고서 본 필자도 그렇게 느겼으니, 감독의 그런 노력은 충분히 빛을 발한 듯 싶다.


존더코만도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는 나치 수용소에 있는 부대로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동족인 유대인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 이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존더코만도가 되는 게 아니라 수용소에 도착하면 나치에 의해 선택받는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다. 선택되면 죽지 않는 이상 해야만 하는 상황. 그들은 나치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인력이었기에 대우도 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대우를 해줬던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이들 또한 가스실로 보내졌고, 새로운 이들로 존더코만도를 대체했던 것. 

이 때문에 실제로 1944년 10월 7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폭동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는 걸 듣기만 했으면 아마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다. 왜냐면 근거가 확실한 얘기는 아니니까. 그러나 실제 자신과 함께 존더코만도 역할을 했던 이가 가스실로 보내졌다는 걸 알게 되면 나도 이제 같은 신세가 될 터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기 때문에 폭동을 할 만도 한 법. 실제로 폭동도 그렇게 일어났다. 이때 수용소를 탈출한 이들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일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만다. <사울의 아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도 아니고, 캐릭터도 허구지만 스토리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참고해서 만들었다는 걸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900명 정도의 존더코만도가 있었다는데, 생각보다 많은 수다. 그러나 당시 열차 한 대로 이송되어 오는 유대인은 1,000명 정도고, 수용소에서 처리를 못할 정도로 많았다고 하니 900명이 그리 많은 수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이렇게 열차 한 대로 이송되어 온 유대인 1,000명을 처리하는 데에는 고작 1시간 반 정도의 시간 밖에 안 걸렸다고 한다. 그만큼 나치는 어떻게 하면 빨리 처리를 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연구하고 고민했던 것. 이때 수용소의 유대인을 상대로 생체 실험을 한 유명한 인물이 있다. 스티코 매거진에서도 나쁜 녀석들 연재로 다뤘던 요제프 맹겔레가 바로 그다.



홀로코스트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하면 대학살을 의미하지만 고유명사로 사용되었을 때는 유대인 학살을 뜻한다. 실제 증언에 따르면, 열차를 타고 도착한 유대인들은 마당에 집결하여 탈의를 하게 한다. 이때 가져온 물건들 중에 귀중품은 다른 물건들과 구별하여 놓도록 하고, 목욕을 한 후에 따뜻한 커피를 준다는 약속으로 가스실로 데려간다. 이때 챙긴 물건들은 존더코만도들이 생활하는 데에 사용하기도 하고, 귀중품들은 모아서 전쟁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된다. 귀중품을 모으는 것도 존더코만도들이 하는 일 중에 하나였는데, 이때 존더코만도들이 빼돌린 귀중품들은 존더코만도들끼리 뇌물로 사용되곤 했다. 영화에서도 잘 나오는 부분.

가스실 천장은 사람의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로 낮았고, 가스실이 목욕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면 몽둥이로 때려가면서 몰아넣었다. 문을 잠그고 가스를 살포한 후, 2분 정도 지나면 모두 죽지만, 5분이 지나야 문을 열고, 가스실에 있는 가스 때문에 20분 정도는 문을 연 상태에서 가만히 놔둔다. 그 후에 존더코만도들이 시체들을 꺼내어 옮기는데, <사울의 아들>에서처럼 손목이나 발목을 잡고 질질 끌면서 옮겼다고 한다.


유대인 장례법

주인공 사울은 아들(이게 자신의 아들인지 아닌지가 애매모호하다.)의 시신을 빼돌려 장례를 치르려고 한다. 이는 유대인 장례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유대인 장례법에 따르면, 죽은 지 24시간 이내에 묻어야 하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위적인 훼손을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땅에 묻어야 한다. 자신의 아들을 부검하려 하기도 했고, 가스실에서 죽은 시체는 화장을 하기 때문에 빼돌렸던 것.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랍비를 찾는데, 랍비는 장례 의식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카디쉬(Kaddish)라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기도 의식을 암송하는 걸로 의식을 진행하는데, 이를 위해 랍비를 찾아다녔던 것.


스토리는 아쉽다

사실 필자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때문이 아니라, '시체 처리반으로 일하던 남자 앞에 오늘, 아들의 주검이 도착했다'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아들을 키우고 있는 필자기에 만약 그런 상황에 나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에 선택했는데, 스토리를 통한 감흥이 그리 크진 않았다. 그런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부성애를 재치있게 그린 <인생은 아름다워>나 결말에 대한 많은 여운을 남겼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단 얘기. 이 때문에 이 두 영화는 필자가 강력히 추천하는 영화지만 <사울의 아들>은 글쎄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는 아빠가 너무 태연했던 점, 그렇게 태연했던 그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시신을 빼돌리고 랍비를 찾아다닌다는 점, 그게 정말 자신의 아들인지 영화는 얘기해주지 않는다는 점(영화 속에서는 주변 지인들이 사울에게 '너는 아들이 없다'고 얘기하곤 한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그가 수용소를 탈출하고 마지막에 웃는 점 등은 적어도 필자로 하여금 감흥을 일으키거나 강한 여운을 남겨주기 보다는 왜 이렇게 스토리를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굳이 해석하자면, 해석이야 가능하다. 첫 번째로,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죽은 시신을 본 게 아니라 의무관이 마지막 남은 숨을 끊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일말의 감정 변화도 없이 무표정하고 태연하기 쉽지 않다. 어떻게 행동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돌아서서 속으로라도 울분을 토해야 하는 게 당연할 진데 너무나도 태연하고 무덤덤하다. normal이 아니니 abnormal 즉 미친 거다. 사실 그런 상황 자체가 미친 거였으니 그 속에 있는 인간이 미치는 건 지극히 당연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고 미쳤다면, 그 자리에서 뭔가 행동을 옮겼어야 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미침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로, 이미 죽은 아들인데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는 게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주인공은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시신을 빼돌리고 랍비를 찾아다니니 말이다. 이런 그의 행동은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느낄 수 있는 부성애와는 전혀 다르다. 사랑과 집착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누구에겐 사랑이라도 누구에겐 집착이 될 수도 있으니), 그의 행동을 부성애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정도로 과도하게 집착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 번째로, 주변에서 주인공에게 너에겐 아들이 없다고 하는 얘기는 주인공이 본처가 아닌 이로부터 얻은 아들 즉 남이 모르는 아들이 있다고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이상할 것도 없긴 하지만, 애매한 장면이 많다. 마치 아들의 죽는 모습을 보고 미친 게 아니라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말도 안 되는 극한 상황 속에서 정상처럼 보이나 애초부터 미쳐 있는 걸로 설정된 그인지라 자신의 아들이 아닌데도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네 번째로, 영화 내내 한 번도 표정 변화가 없던 그가 마지막에 활짝 웃는 모습은 결국 비정상적인 상황을 벗어나서(수용소를 탈출해서) 결국 정상적인 상황에 놓임으로써 정상으로 돌아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해석이야 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하든 필자가 스토리는 아쉽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게 당시 상황을 마치 체험한 듯 현장감 있게 전달하고,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잘 드러내는 스토리를 만들려다 보니까 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너무 욕심이 과했던 게 아닌가 싶단 얘기.

그래서 스토리 부분은 아쉽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중에서 앞으로도 회자될 만한 요소를 갖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영화를 즐겨 보는 이들에게는 권할 만해도 일반적인 추천을 하기가 조금은 힘든 면이 있다. '이런 영화인데 한 번 볼래?'라고 얘기할 순 있어도 '나 믿고 한 번 봐바'라고 얘기하기는 힘들단 얘기. 그래도 만화를 원작으로 한 말초적인 재미만 선사하는 히어로물이 대세인 요즈음에 이제는 다뤄봤자 흥행하기 힘든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가 주목받았다는 점에서 필자는 의미있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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